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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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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체 왕국은 고대 마야 문명의 국가로, 현재 과테말라 지역에 존재했다. 역사적 출처는 식민 시대 이후 스페인어, 고전 키체어 등으로 기록된 문서들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주요 자료로는 《포폴 부흐》가 있다. 키체족은 기원전 600년부터 이 지역에 거주했으며, 1200년경 멕시코 만에서 온 외세의 침략으로 세 개의 지배 혈통이 형성되었다. 키체 왕국은 쿠크쿠마츠 시기에 영토를 확장했으나, 이후 1470년 반란과 주변 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겪었다. 1524년 스페인 정복자 페드로 데 알바라도에 의해 멸망했으며, 사회는 귀족과 봉신으로 나뉘는 계급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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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체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쿠마르카즈
일반 명칭키체 왕국
위치과테말라
수도치티나미트(1225-1400), 쿠마르카즈(1400-1524)
역사
존속 기간 시작1225년경
존속 기간 끝1524년 정복
이전p1:
이후s1: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flag_s1: Flag of New Spain.svg
정치
정부 형태군주제
지도자 칭호아지팝
첫 번째 지도자발람 키체 (~1225–1250)
마지막 지도자옥시브 케 (~1500–1524)
언어 및 민족
공용어고전 키체어
민족키체인
기타
키체 왕국
키체 왕국

2. 역사적 출처

키체 왕국의 역사는 식민 시대 이후에 스페인어고전 키체어 및 카크치켈어와 같은 토착 언어로 작성된 여러 문서에 설명되어 있다. 중요한 자료로는 잘 알려진 신화 외에도 토토니카판 문서와 같이 카웨크 가문의 역사와 계보를 담고 있는 포폴 부흐가 있다. 이 자료의 정보는 키체의 가신이자 후일 적이 된 카크치켈의 역사를 기록한 카크치켈 연대기와 대조해 볼 수 있다. 사카풀라스 문서, 코요이 문서, 니자이브 문서, 타무브 문서와 같은 다른 여러 원시 제목들은 각기 특정 키체 가문의 관점에서 키체 역사를 설명한다. 이 외에도 정복자와 성직자가 쓴 자료, 식민 행정부의 행정 문서 등이 키체 왕국 연구에 활용된다.

3. 역사

후고전기 시대 과테말라 남부 지도 - 주요 키체 도시 중심지(검정색)와 주변 민족 집단(흰색)의 위치를 표시함.


키체 왕국의 역사는 1200년경 멕시코 만 연안에서 온 외부 세력이 과테말라 고지대로 들어와 키체족을 비롯한 원주민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키체 선조"로 불리며, 키체 왕국의 세 지배 혈통을 형성했다. 초기 수도는 자카위츠였으나, 이후 피스마치를 거쳐 쿠마르카흐로 옮겨졌다.

15세기 초, 쿠크쿠마츠와 그의 아들 키크아브의 통치 아래 키체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 시기에는 카크치켈족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1470년경 발생한 내부 반란과 이어진 카크치켈족의 이탈로 왕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키체는 츠투힐족, 라비날족 등 주변 세력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으며, 15세기 말에는 중앙 멕시코에서 세력을 확장한 아즈텍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524년, 스페인정복자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면서 키체 왕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키체는 테쿤 우만의 지휘 아래 저항했으나 여러 차례 패배했고, 결국 수도 쿠마르카흐는 함락되고 파괴되었다. 이로써 과테말라 고원을 지배했던 키체 왕국은 멸망하였다.

3. 1. 기원 (기원전 600년 ~ 서기 1200년)

마야 키체족은 기원전 600년부터 과테말라 고지대에 거주해 왔지만, 키체 왕국의 기록된 역사는 1200년경 멕시코 만 연안에서 온 외부 세력이 파시온 강을 통해 고지대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침략자들은 "키체 선조"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이 키체 왕국의 세 지배 혈통(니마 키체, 타무브, 일로크'아브)을 세웠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은 세 개의 키체 혈통, 카크치켈, 라비날, 츠'투투힐족의 선조, 그리고 테페우 야키라고 불리는 일곱 번째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침략자들의 민족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민족사적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도착 당시 토착 키체족과 소통할 수 없었고, 나와틀어를 사용하는 "야키"족이었다고 한다. J.E.S. Thompson은 그들을 멕시코화된 푸툰 상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카막(1968)은 그들이 톨텍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중 언어 사용자, 즉 나와틀어촌탈 마야어를 함께 사용했으며, 상인이라기보다는 정복자로서 도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시기부터 키체어에 나와어의 영향이 나타났다는 점은 잘 기록되어 있으며, "선조"들의 이름 역시 키체어보다는 촌탈어나 나와틀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1] 키체 선조들은 자신들의 부족 신을 가져왔는데, 키체 부족의 수호신은 하늘의 신 토힐이었다.

3. 2. 건국과 발전 (1225년 ~ 1400년)

초기 ''아흐팝'' 쿰아르카흐 (추정 재위 기간)
통치자재위 기간 (추정)
발람 키체~1225–1250
코코하~1250–1275
에 츠킨~1275–1300
아흐칸~1300–1325
코카입~1325–1350
코나체~1350–1375
코투자~1375–1400



키체 민족의 "선조"들은 고원 지대에 살던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추유유프 계곡의 자카위츠에 수도를 세웠다. 이 시기 카크치켈족, 라비날족, 추투힐족은 키체의 동맹이었으며, 키체의 통치 아래 있었다. 당시 네 민족의 언어는 서로 비슷했지만, 점차 교류가 줄어들고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면서 언어가 분화되어 오늘날과 같이 각기 다른 언어가 되었다.[2]

키체 민족은 크게 세 계통으로 나뉘었다. 지배 계급인 니마 키체(Nima K'iche'), 상인으로 추정되는 타무브(Tamub), 그리고 전사 계급인 일로캅(Ilok'ab)이 그것이다. 각 계통은 또다시 하위 계통으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니마 키체 계통에는 아하우 키체(Ajaw K'iche'), 카웨크(Kaqwek), 니하이브(Nijaib), 사킥(Sakiq)이 있었고, 타무브 계통에는 에코아마크(Ekoamak')와 카코흐(Kako)가 있었다. 일로캅 계통에는 시콰(Sik'a)와 와니하(Waqija)가 속했다.

발람 키체 시대에 자카위츠를 정복하고 정착한 이후, 츠킨이 통치하던 시기 키체는 라비날족 영토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카크치켈족의 도움을 받아 포코맘족을 정복했다. 이후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피스마치(Pismachi')를 건설하고 그곳에 대규모 종교 중심지를 세웠다.

피스마치에서는 코콰이바와 코나체가 함께 통치했지만, 곧 계통 간의 내부 갈등이 벌어졌다. 결국 일로캅 계통은 피스마치를 떠나 인근 마을인 무크위츠 칠로캅(Mukwitz Chilokab)에 자리를 잡았다. "매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의 키체 통치자 칭호인 ''아흐팝''(Ahpop) 코투자의 통치 기간 동안, 일로캅은 니마 키체 계통의 지도자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크게 패배했다. 코투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키체의 영향력을 더욱 넓혔으며, 자신의 가족 구성원들을 카크치켈족과 추투힐족의 지배 가문과 혼인시켜 이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했다.

3. 3. 쿠크쿠마츠와 키크아브 (1400년 ~ 1475년)

K'otuja'|코투자myn의 아들 Q'uq'umatz|쿠크쿠마츠quc 치세에 Nima K'iche'|니마 키체quc 계열은 Pismachi'|피스마치myn를 떠나 "썩은 갈대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Q'umarkaj 근처에 정착했다. 쿠크쿠마츠는 K'iche'|키체quc의 가장 위대한 "나구알" 영주로 알려졌으며, 전설에 따르면 뱀, 독수리, 재규어, 심지어 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하늘을 날거나 지하 세계인 시발바(Xibalba)를 방문할 수도 있었다. 쿠크쿠마츠는 처음에는 피스마치에서, 나중에는 쿠마르카흐에서 키체 왕국을 크게 확장시켰다.[3] 이 시기 키체는 Kaqchikel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4]

쿠크쿠마츠는 자신의 딸을 쿠추마탄 산맥(Sierra de los Cuchumatanes)에 기반을 둔 마야 부족인 K'oja|코하myn의 영주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코하의 영토는 사카풀라스(Sacapulas)와 웨웨테낭고(Huehuetenango) 사이 어딘가에 위치했다.[5] 그러나 코하의 왕 Tekum Sik'om|테쿰 시콤myn은 키체-카크치켈 동맹에 복종하는 대신 쿠크쿠마츠의 딸을 살해했다.[6] 이 사건은 쿠마르카흐의 키체-카크치켈 동맹과 코하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6] 쿠크쿠마츠는 이 코하와의 전투 중에 사망했다.[6]

과테말라 고원 - 광대한 키체 왕국의 위치


쿠크쿠마츠의 아들 K'iq'ab'|키크아브quc는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를 맹세했다. 2년 후, 그는 왕 선출자인 Ajpop K'amha|아히포프 카마quc와 함께 키체-카크치켈 동맹군을 이끌고 코하를 공격했다.[7] 키체군은 동틀 녘에 코하의 수도에 진입하여 테쿰 시콤 왕을 죽이고 그의 아들을 사로잡았다.[7] 키크아브는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고, 많은 포로와 코하가 소유했던 모든 과 금속을 가지고 쿠마르카흐로 돌아왔다. 그는 사카풀라스 지역의 여러 정착지와 사쿨레우(Zaculeu) 근처의 Mam을 정복했다.[7]

특히 호전적이었던 키크아브의 통치 아래 키체 왕국은 크게 확장되었다. 서쪽으로는 멕시코 치아파스 해안과 과테말라 태평양 해안 사이의 현대 국경 근처인 오코스 강(Ocos River)까지, 북쪽으로는 라비날(Rabinal)과 코반(Cobán), 서남쪽으로는 케찰테낭고(Quetzaltenango)까지 영토를 넓혔다.[7] 카크치켈의 도움으로 동쪽 국경은 모타과 강(Motagua River)까지, 남쪽으로는 에스쿠인틀라(Escuintla)까지 확장되었다.[8]

1470년, 모든 고지대 민족 대표들이 모이는 큰 축제가 열리는 동안 쿠마르카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8] 키크아브의 두 아들이 그의 가신들과 함께 왕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고위 영주, 카크치켈 전사, 그리고 카웨크(Kaweq|카웨크quc) 가문의 구성원들이 살해되었다.[9] 반란군은 키크아브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도시 외곽의 Pakaman|파카만myn에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아들들의 보호를 받았다.[9] 반란의 결과, 키크아브는 권력의 일부를 반란을 일으킨 키체 영주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10] 새롭게 권력을 잡은 키체 영주들은 기존의 동맹이었던 카크치켈을 배신했다. 이로 인해 카크치켈은 쿠마르카흐를 떠나 Iximche에 자신들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며 독립하게 되었다.[10]

1475년 키크아브 왕이 사망한 후, 키체는 Tz'utujil 및 카크치켈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아마도 과거 쿠마르카흐가 누렸던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1]

3. 4. 쇠퇴와 정복 (1475년 ~ 1524년)

키크아브(Kʼiqʼab) 사후 약화된 키체는 카크치켈, 츠'투힐, 라비날, 그리고 피필 등 주변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테페풀의 지휘 아래 키체는 기근으로 약해진 이심체를 기습하려 했으나, 카크치켈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키체 군대를 격파했다. 두 세력 간의 전쟁은 1522년 평화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 키체는 라비날과 치아파스 해안의 소코누스코를 복속시키는 등 일부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과거의 패권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1495년경 중앙 멕시코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아즈텍 제국은 과테말라 고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즈텍 틀라토아니 아위초틀은 기존에 키체에 공물을 바치던 소코누스코 주를 정복했다. 이후 아즈텍의 장거리 무역상인 ''포치테카''(pochteca)가 쿠마르카흐(Qʼumarkaj)에 도착하자, 키체 통치자 7 노지는 그들을 추방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1510년, 모테수마 2세가 보낸 아즈텍 사절단이 쿠마르카흐에 도착하여 공물을 요구하자 키체는 결국 아즈텍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여야 했다. 1510년부터 1521년까지 쿠마르카흐에서 아즈텍의 영향력은 커졌고, 7 노지는 모테수마 2세의 딸 두 명과 결혼하며 아즈텍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이 시기 쿠마르카흐는 나우아틀어 이름인 ''우타틀란''(Utatlán)으로도 알려졌다. 1521년 아즈텍 제국이 스페인에 의해 멸망하자, 아즈텍은 키체 통치자에게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현대 케찰테낭고의 테쿤 우만 동상.


스페인 군대가 도착하기 전, 키체는 이미 유럽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한편, 키체의 오랜 적이었던 카크치켈은 1520년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키체를 공격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코르테스는 쿠마르카흐에 사절을 보내 스페인 통치에 평화롭게 항복하고 카크치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키체는 이를 거부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1524년, 정복자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기병 135명, 보병 120명, 그리고 400명의 아즈텍, 틀락스칼텍, 촐루텍 출신 원주민 동맹군과 함께 과테말라에 도착했다.[12][13] 카크치켈은 즉시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키체는 첩자들을 통해 스페인 군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스페인 군대가 키체 도시 셸라후 노흐(케찰테낭고)에 도착하자, 키체는 토토니카판의 영주인 테쿤 우만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테쿤 우만은 8,4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케찰테낭고 남쪽 피날(Pinal) 평원에서 스페인 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몇 차례의 패배 후, 키체는 스페인에게 항복 의사를 밝히고 1524년 3월 7일 알바라도를 쿠마르카흐로 초대했다.[14] 그러나 이는 알바라도의 함정이었고, 그는 쿠마르카흐의 키체 지도자들을 붙잡아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이후 알바라도는 두 명의 하급 키체 귀족을 꼭두각시 통치자로 세우고 나머지 키체 영토를 정복해 나갔다. 쿠마르카흐는 키체인들이 요새화된 도시를 재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인근의 산타 크루스 델 키체로 강제 이주되었다.

4. 사회 조직

후기 후고전기 시대 대 키체(Qʼumarkaj) 지역의 인구는 약 15,000명으로 추정된다.[15] 키체 사회는 크게 귀족과 그들의 봉신으로 나뉘었다. 귀족은 'ajaw|아자우quc'로,[16] 봉신은 'al kʼajol|알 카홀quc'로 불렸다.[16] 귀족들은 서기 1200년경 멕시코만에서 온 정복자 전사들의 부계 후손으로 여겨지며,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언어를 잃고 피지배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17] 귀족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왕족의 지위를 가졌다.[18] 봉신들은 보병으로 복무하고 귀족이 만든 법을 따라야 했지만,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치면 군사적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구분은 매우 엄격하여 카스트 제도와 유사하게 운영되었다. 상인 계급은 특권을 누렸지만, 귀족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이들 외에도 농촌 노동자, 장인, 그리고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나 전쟁 포로로 이루어진 노예 계층이 존재했다.

키체에는 24개의 중요한 혈통, 즉 'nimja|님자quc'가 있었다.[16] 'nimja|님자quc'는 키체어로 "큰 집"을 의미하며, 각 혈통이 거주하던 궁궐 단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20] 이 혈통들은 귀족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궁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19] 결혼 협상과 관련된 연회나 의례적인 강연 등을 주관했다.[19] 님자는 강력한 부계 혈통 중심 사회였으며, 이들 중 더 크고 강력한 4개의 님자가 도시의 통치자를 선출했다.[20] 스페인 정복 당시 통치권을 행사하던 4개의 님자는 카웨크(Kaweq), 니자이(Nijaib), 사키크(Saqik), 그리고 아자우 키체(Ajaw Kʼicheʼ)였다.[16] 카웨크와 니자이에는 각각 9개의 주요 혈통이 속했고, 아자우 키체에는 4개, 사키크에는 2개의 혈통이 포함되었다.[20] 통치자를 선출하는 것 외에도, 통치 가문인 카웨크 왕조는 도시의 재정을 관리했을 가능성이 있는 쿠쿠마츠(Qʼuqʼumatz)의 강력한 사제들을 배출하는 혈통이기도 했다.[2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a
[4] 서적 a
[5] 서적 a
[6] 서적 a
[7] 서적 a
[8] 서적 a
[9] 서적 a
[10] 서적 a
[11] 서적 a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Popul Vuh: The Sacred Book of the Maya https://www.google.c[...]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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